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줄거리 결말 및 후기 - 교육이란 무엇인가
- 영화보고 끄적쯔적
- 2020. 5. 15. 19:55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제목은 극중의 문학 동아리 이름입니다. 사실 오역된 제목인데요. 적절한 번역명은 죽은 시인 동아리 라고 합니다. 교육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 ' 무엇이 바람직한 교육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학교 교육에 대하여도 비판을 하고 있지만 부모 교육에 대하여도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이 것이 비단 미국 교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육에도 견주어서 생각해 볼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의 소유물인양 학습을 강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자녀를 인격체가 아닌 부모의 인형으로 보는 시선이 얼마나 위험한것인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감독 피터위어
개봉일 1990년 5월 19일
출연 로빈 윌리엄스, 로버트 숀 레너드, 에단 호크, 커트우드 스미스
딜런 커즈먼, 노먼 로이드, 제임스 워터슨, 조시 찰스, 레온 파우널, 게일 한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줄거리 및 결말
한 사립학교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문학 동아리가 있습니다. 동아리 '죽은 시인의 사회'는 재결성 이후 밤에 몰래 나가서 회원 각자가 원하는 시를 낭송하는 자리였는데 그걸 찰리 달튼이 장난 삼아 신문지상에 '애인 구함'식으로 광고를 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위기는 찰리 달튼이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노출시키면서 발생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개신교계 귀족 사립학교인 윌튼 아카데미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런데 한 술 더 떠, 찰리 달튼은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을 불러 솔직하게 나와서 누가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광고를 냈는지 말해주면 용서하겠다고 하자, 한 편의 코미디를 보여주며 오히려 보수적인 교장선생님에게 한방 먹였다.
달튼은 그 대가로 크리켓 채로 엉덩이를 맞는 체벌을 받는다. 찰리 달튼은 불으라는 교장의 대답에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이때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재를 들켰다.
한편 밝고 공부도 잘 하나 초반부터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못하던 모습을 보이던 닐 페리는 부활동은 적당히 하고 공부에 충실하라는 아버지 몰래 연극부에 들어가 한여름밤의 꿈의 '퍽' 역을 따낸다. 그러나 공연 전날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쳐들어와서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합니다. 닐은 매우 연극이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겠다고 하나 이후 존 키팅 선생님에게 상담을 하러 간다. 닐은 "나에게 연극은 모든 것이고 이제껏 해본 적이 없는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이라고 푸념하나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길 바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키팅은 "지금 나한테 한 말을 아버지한테 하고 너의 열정을 보여서 허락을 받아 내라"고 격려해준다.
그러나 닐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연극에 나가기로 결심한 후 선생님께는 아버지께 허락을 맡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물론 키팅 선생님은 이를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합니다. 그러나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도중에 연극을 말 없이 보러 오고, 닐은 그걸 보면서 최선을 다한 연기를 했지만, 공연 후 호평 일색인 친구들과 선생님을 뒤로 하고 아버지에게 끌려간다. 닐은 아버지에게 끌려가 심한 꾸중을 들은 뒤 날이 밝으면 유년사관학교에 강제 전학을 시키겠다는 폭탄선언을 받고 나서, 아버지를 더 이상 설득할 자신을 잃어버린다. 결국 돌아온 날 밤, 닐은 자신의 첫 역할 '퍽'이 쓰는 관을 써본 뒤 아버지 서재에 보관되어 있던 권총으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닐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고 했고, 학생의 자살을 쉬쉬하고 싶었던 교장 역시 희생양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부원 중 하나인 리처드 카메론이 닐이 죽은 시인의 사회 회원이었습니다는 것과 키팅 선생이 연극에 나갈 수 있도록 격려했다는 것을 실토하여 교장은 처음부터 눈엣가시로 여겼던 키팅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합니다. 이걸 듣고 달튼이 카메론에게 욕을 하자 카메론은 "선생님이 우릴 부추긴 게 맞고, 선생님이 아니였으면 닐은 죽지도 않고 의사가 되었을 거다"라고 외치다가 한 대 맞는다.
교장은 불문에 붙인다는 조건을 붙여 부원들을 부모 동반으로 하나하나 불러 상담을 거친 뒤 존 키팅이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는 증언을 강요하고 거부할 시 퇴학이라는 협박 같은 심문을 합니다. 유일하게 찰리 달튼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퇴학을 선택하나, 나머지 부원들은 부모와 교장의 압박에 못 이겨 사실상 (조작된) 키팅의 해고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합니다. 존 키팅은 부모의 그릇된 욕망으로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음에도 오히려 그 책임을 학생들에 의해 전가받게(강요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된 것이었습니다.
영문학 수업은 임시로 놀란 교장이 맡게 되었고, 역시나 수업 내용은 비평 이론에 치우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 수업 첫 시간, 키팅은 사무실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 교실에 들어왔는데, 토드 앤더슨이 갑자기 일어나 부원들은 교장에게 강요당해서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외친다. 키팅의 결백을 주장하는 토드에게 놀란 교장은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잠시 후 토드 앤더슨은 책상으로 올라가 월트 휘트먼의 시의 한 구절이자 평소 제자들이 존 키팅을 부르는 별명 오 캡틴 마이 캡틴(O Captain! My Captain!)을 외치고,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일부 학생들이 떠나는 존 키팅을 향한 마지막 인사로써, 토드처럼 책상에 올라간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나머지 학생들은 그대로 있는다. 이 공존의 풍경은 다수 혹은 타인의 강요에 의한 관성적인 선택이 아닌 자유의지의 의미를 학생들이 깨달았음을 암시하는 미장센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제자들을 향해 존 키팅은 모두들 고맙다. 고마워. (Thank you boys. Thank you.) 라고 말하며, 영화는 토드 앤더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후기
예비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에서도 교육학 과목 시간에 이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게 한다. 교육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는 바람직하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교육에 대해 키팅 선생만큼이나 진보적인 사람이 교단에 서더라도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바꾸기는 영화처럼 매우 힘들다. 교육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시는 특별하려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바닥이며, 교육과 학업이 취업을 위한 수단에 가깝고, 자식농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는 등에 연연하는 부모가 여전히 많다.
먹고 사는 문제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며 사실상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 과제다. 교육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교육을 대하는 부모의 보편적인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힘들다. 혁신 학교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교육청 점거 농성 안타깝게도 세대가 교체되어도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신세대 부모들 역시 점수만을 위한 교육을 답습하곤 한다. 그들 자신이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팅 선생이 교실을 떠날 때 학생들이 O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며 책상 위에 서는 장면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무마되었긴 했으나 학생을 위하는 진실된 교육은 사회적 영향력을 떠나 절대로 무의미한 행위가 아님을 새기도록 하자.
키팅 선생님에 대해 긍정적인 평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영화의 주요 배경인 월튼 아카데미의 타 학교와 구분되는 특수성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하는데, 월튼 아카데미는 설정상으로 미국 내 최고의 명문 학교이며 명성에 걸맞게 명문 학교 진학자를 배출해내는 것이 이 학교의 특수성이니 키팅 선생님 특유의 자유분방한 교육관과는 당연히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장교로 복무를 하다가 전역하고 사회에 나가 학위를 위해 공부를 하면서 진보적인 가치관을 갖게 된 한 교수가 사관학교의 외래교수로 취임하여 '사관학교 특유의 경직적인 학내 문화를 바꿔야 한다'라며 생도들에게 강의하는 상황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일반적인 대학교에서는 적어도 '강의실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사관학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월튼 아카데미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키팅 선생님의 시도는 충분히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사실, 영화에서는 긍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키팅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영화 속 학생 주인공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문학 써클을 만들어 써클 활동을 위해 밤에 몰래 기숙사 밖으로 도망쳐 야산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노는 등 엄연한 일탈 행위를 일삼으나 키팅 선생님은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면모가 과연 교육적 측면에서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가에 대해서도 의심해 볼 수 있으며, 가치관이 충분히 확립되지 못한 10대 후반의 청소년에 불과한 아이들이 자신을 따르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 물어볼 때 '살아서는 평생 정식 회원이 될 수 없고, 죽어야만 정회원이 된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것이 한 어른, 그것도 부모 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한 교직원으로써 어린 학생에게 아무런 여과없이 할 수 있는 말인지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이로 인해 '죽음'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조금 비약시켜서 닐의 자살에도 일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포일러 부분에서는 닐의 부모가 자신의 아들의 자실에 대한 책임을 학교와 키팅 선생님에게 전가시키려 한다는 서술이 있지만, 키팅 선생님에게 책임을 물리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자신의 제자가 부모의 틀에 갇혀 불안해하는 모습, 특히 아직 사춘기라 정신적으로 여전히 미약하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부모에 대한 설득을 시도하거나, 설득이 잘 안 된다면 부모의 의견을 어느정도 절충시켜 닐의 성장에 보탬이 되도록 조율시키는 것도 엄연한 교사의 사명이나, 키팅 선생님에게는 이러한 면모가 별로 없었다.
결정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제자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였고, 키팅 선생님 본인 또한 닐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자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월튼 아카데미의 특수성과 연관지어 볼 때, 명문 대학 진학생을 배출시키는 것을 우선적인 가치로 내세우는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진로를 생각하게 된다면 큰 돈을 투자하여 학생을 믿고 보내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고, 키팅 선생님 본인도 이를 사전이 충분히 감수하여 다른 전략을 취할 수도 있었다는 것. 아무튼, 키팅 선생님의 경질 과정에서 교장인 놀란 선생의 강압과 다소 지나치다시피 한 음모도 있긴 했지만, 키팅 선생님도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관객들은 특히 주인공 닐에게 감정을 많이 이입하면서 보게 되긴 하지만, 닐 또한 사춘기 소년으로서 여러모로 한계를 지닌 인물임을 보여준다. 먼저 닐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지만, 사실 이런 욕구는 10대 시절이라면 어떤 청소년이든지 흔히 겪으며, 그렇기에 충분한 고민을 통해 내린 결정인지도 의심해볼 수 있다. 충분한 고민이라면 단지 하고싶은 이상을 어떻게든 하겠다는 욕구만 앞서서는 안되고, 냉혹한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에 대해 좀 더 심사숙고를 해야했다. 다시 말해서, 주도적인 면모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아버지의 억압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아버지 앞에서 기가 죽는 모습을 주로 보이며, 거기에 당당히 맞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기보다는 '역시 우리 아빠는 이래~'라는 푸념으로 그친다는 것도 아주 안타까운 부분이다. 물론 닉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부터 매우 강압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에게 기가 죽고 눌린 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며,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아직 미성년자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이에 그걸 극복하는 게 쉬운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부모는 자식이 명문 대학에 진학해서 의사나 고위급 공무원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지라(미국도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그런 가치관이 많이 남아 있었고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보다 더하다), 자녀가 공부보다 음악이나 미술을 하고 싶다고 하면 쉽게 허락해주는 부모는 많지 않고, 이쪽 바닥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대부분 유년 시절에 이 문제로 부모와 크게 싸운 경험이 있다고 회고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열정을 충분히 보여주어서 부모의 허락을 이내 받아내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가수 이적처럼 학업에 당장은 충실해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에 따라 보란듯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에 그쪽으로 진로를 잡아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닐은 후자의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예를 들면, 월튼에서 군사 학교로 전학시키려는 아버지의 요구에 대해 '그러면 10년도 더 걸릴 거예요'라고 말하며 호소하는 장면)을 보인다.
닐의 경우는 연극을 좋아하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준 것이 한 여름 밤의 꿈에서의 연기 딱 한 번 뿐이었기에 자신의 열정을 부모에게 충분히 어필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져 왔던 것도 아니라 외출을 하였다가 우연히 접한 전단지를 보고 갑자기 하고싶어져서 시작한 것에 가깝기에(전부터 연극을 해 보고 싶었고, 관련된 여름 방학 프로그램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있지만, 그 말에 이어서 '아버지가 반대할 게 뻔해서 못 갔어'라고 말한다.) 그것이 닐의 궁극적인 목표인지 아니면 사춘기 시절의 일순간의 냄비같은 열정인지도 감정을 이입하지 않은 제 3자 입장에서는 불분명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강압적인 자신의 아버지 탓만 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극을 마치고 집으로 강제 송환된 닐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라고 감정적으로 맞서는 장면은 있으나,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냥 연극 따위나 하는 것이냐?'라고 아버지가 받아치자 닐도 그냥 주저앉아버린다. 자신이 충분히 고민을 하고 내린 선택이라면 자신이 연극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적어도 구체적인 설득을 시도할 법도 한데, 닐은 감정적으로만 맞서다가 아버지의 기에 억눌려 좌절한다. 결국 닐은 '사춘기 시절의 흔한 열정적 욕망에 사로잡혀 연극을 하려고 한 것이지, 자신의 미래와 진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을 한 것은 아니'라고 비춰져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타이르려 하기보다는 가부장적인 권위로 닐을 몰아세우려 하는 그의 부모의 어긋난 방식은 비판받을 만하다. 의사를 시키려면 우선 자식이 이를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계속해서 체크하고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의사가 되는 것을 절대 진리로 정해놓고, 따르지 않으니까 화내고 무시하는 것은 그냥 부모의 욕심인 것이다. 거기다 아직 미성년자인 자식은 하늘같은 부모가 자기를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터놓지도 못한다. 만약 극중 닐의 아버지가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닐도 아버지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것이다. 즉 평생에 걸친 경험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학습했기에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작중 초반에 닐의 아버지가 학업과 관련없는 활동이 많다는 이유로 교외활동을 줄이라는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야기 후에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대들지 마라는 권위적인 면모를 보인 장면을 볼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아버지의 말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 것 역시 아버지의 일방적인 모습으로 인한 결과로 보여진다.
또 윗 문단에는 닐이 청소년기의 흔한욕망에 사로잡혀 꿈만 찾아다니는 학생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교외활동이 많음에도 높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던 점, 키팅선생과의 대화 중 자신이 꿈꿔왔던 연극활동을 하면서도 학업에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던 점을 볼때 자신의 진로에 대해 경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한낱 청소년기의 흔한 욕망에 불과 했다고 해도, 연극이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합리적인 진로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닐 페리의 아버지는 그러한 기회를 일말 주지 않았고, 이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키팅선생의 ‘현재를 즐기라’라는 구절은 단순히 모든 것을 제처두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라는 대목을 볼때, ‘카르페 디엠’의 뜻은 삶의 주체로서 삶의 목적을 가지는 과정을 탐구하라는 것이지 학업을 포기하라는 것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업만에 열중했고, 열중하게 될 학생들에게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또 키팅선생이 죽인 시인의 사회의 일탈에 대해 방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역시 타당성이 부족하다.
키팅선생은 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는 길을 열어 주고, 이것을 경험할 ’기회’를 준 것이지 일탈적인 행동에 대해 가만히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 있는 학생 한명의 자의적인 행동으로 퇴학 위기에 놓였을때 "대담할 시간과 조심할 시간을 따로 있는 거야. 현명한 자는 알고 있지. 퇴학당하는 것은 대담한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라는 구절을 통해 재확인된다.
즉 키팅선생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것이지, 학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영화보고 끄적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시민 노무현(2019) 다큐멘터리 (0) | 2020.05.21 |
---|---|
영화 신세계 줄거리 결말(스포) 및 후기 - 세남자가 가고 싶었던 서로 다른 신세계 (0) | 2020.05.18 |
영화 리틀포레스트 줄거리 결말 및 후기 - 잠시 쉬어가되 괜찮아. (1) | 2020.05.15 |
영화 겟 아웃 줄거리 결말 및 후기 - 극한의 경험 (0) | 2020.05.15 |
영화 오션스 8 줄거리 결말 및 후기 (0) | 2020.05.15 |